仁川旅行记 -唐人街(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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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 13, 2016 01:38 汉语

仁川市离我家大约59公里远, 开车去要一个小时。 仁川市是首尔的一种大门, 通过仁川港和仁川机场, 很多人和东西来首尔。 打个比方说, 首尔和仁川的关系好像中国北京和天津的关系一样。 其实在韩国历史上不是重要的城市。 因为朝鲜时代很多船通过汉江, 直接到达首尔。 那时的船都是小的,在汉江运行也没问题。 但是从19世纪末, 跨国的大船不能直接来首尔, 因为那些船很大,在汉江不能运行。 所以在仁川建设了规模大的港口, 就是仁川港。 我可以说,真正的仁川历史19世纪末才能开始。 19世纪末, 中国和朝鲜的贸易频发, 从中国来的很多劳动者在仁川工作了。 这些劳动者大部分从山东省来的, 他们在一个地区一起生活, 还有互相帮助。 这个是现在的仁川唐人街的起源。 (有的人把唐人街叫中华街)

我真喜欢仁川唐人街, 每年两三次一定要去那儿。 因为仁川唐人街是在韩国规模最大的唐人街。 有很多中国风味的古建筑, 中华料理店。 今天我介绍“炸酱面博物馆 (짜장면박물관 ZZA-JIANG-MYEON- BAK-MUL-GUAN)”吧。 本来那间博物馆是中国风味的餐厅。 1908年从山东来的华侨开了“山东会馆”, 然后1911年这老板把以前的名字改了“共和春”。 中国朋友们知道1911年发生的辛亥革命吗? 这老板觉得那件事很值得记忆, 因为在亚洲中国第一次成功共和国的建立。为了纪念共和国的建立, 他命名了共和春, 好像春来, 他觉得建立共和国是好的事。 共和春卖了很独特的菜, 就是炸酱面。 炸酱面是从中国带来的, 但是共和春餐厅把传统的炸酱面变成了更适合韩国人的口味。 共和春对中国劳动者和韩国老百姓都受欢迎, 因为从中国来的人在共和春一边吃着中国菜一边想着家乡, 韩国人可以享受中国风味的美食。 但是1983年共和春关门了, 然后2010年仁川市政府买了这家餐厅的建筑, 2012年在这儿开了“仁川炸酱面博物馆”。


以前在共和春用过的买单。


“三把刀”, 菜刀, 剪刀, 剃刀是韩国华侨的象征。 从外国来的华侨呢, 在韩国找新工作有点难。 但是一旦开餐厅, 西装店, 理发店的话, 更容易挣钱。 所以第一次来的华侨开这些商店的话, 他们的子女继续在父母开门的商店工作, 还有他们的孙子也又继续在这儿工作。


从19世纪末很多中国劳动者在仁川港工作了。 他们在韩国找不到中国风味的餐厅, 而且他们没有那么多钱。 最重要的是他们没有时间, 不可以用力做菜。 所以他们想起来了一个办法, 把中国带来的甜面酱放在面条, 炒几分钟, 这样的话, 容易做完炸酱面。 有两位中国劳动者一起吃炸酱面, 看起来他们很累吧。


1960年代的共和春餐厅提供的扇子。


穿1960年代校服的学生们一起吃炸酱面。 对韩国老人吃炸酱面是一种忘不了的回忆。从1950年代到1970年代, 韩国太贫穷。 那时大部分的韩国老百姓不够营养。 吃炸酱面的话, 可以补充蛋白质和脂肪。但是那时炸酱面对贫穷的老百姓有点贵。 所以很多学生一年两三次才能吃炸酱面, 比如说生日, 入学仪式, 还有毕业典礼, 等等。

炸酱面越来越受欢迎,方便面公司也开发了“方便炸酱面”。 1970年代的方便炸酱面的价格20块韩币左右, 但是2016年的方便炸酱面的价格是1000块韩币左右。 通过约50年的岁月, 物价也那么爆炸地上涨了。


2000年代, 方便炸酱面的种类更多了。 有的公司卖了“四川风味的炸酱面”, 还有有的公司卖了“咖喱风味的炸酱面”。 但是我还没吃过这些方便炸酱面。 我想那些方便面味道真独特, 对消费者没受欢迎的吧。



인천시는 저희 집에서 약 59킬로 떨어져 있으며, 차로 약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곳입니다. 인천은 서울의 일종의 대문입니다. 인천항과 인천공항을 통과하여 많은 사람과 물건이 서울에 옵니다. 비유를 들어 설명하면, 서울과 인천의 관계는 마치 중국의 북경과 천진의 관계와 같습니다. 사실 한국역사상 인천은 중요한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조선시대에는 많은 배가 한강을 통과하여 직접 서울에 왔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배가 모두 작아서, 한강을 운행해도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19세기 말부터, 나라와 나라 사이를 운행하는 큰 배들은 서울로 직접 올 수가 없었습니다. 이 배들은 너무 커서, 한강을 운행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천에 규모가 큰 항구를 건설하게 되었으니, 바로 인천항입니다. 인천의 진정한 역사는 19세기말에서야 시작되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19세기말, 중국과 조선의 무역은 빈발하였고, 중국에서 온 많은 노동자들이 인천에서 일하였습니다. 이러한 노동자들은 대부분 산동성에서 왔으며, 한 곳에 모여 함께 생활하고 서로를 도왔습니다. 이것이 현재의 인천 차이나타운의 기원입니다. (어떤 사람은 차이나타운을 당인가 혹은 중화가라고도 부릅니다)



저는 정말 인천 차이나타운을 좋아합니다. 매년 두 세 번은 꼭 저 곳에 갑니다. 왜냐하면 인천 차이나타운은 한국에서 규모가 가장 큰 차이나타운이기 때문입니다. 중국식의 옛 건물과 중화요리점이 아주 많습니다. 오늘 저는 ‘짜장면박물관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본래 이 박물관은 중국식당이었습니다. 1908년 산동에서 온 화교가 ‘산동회관’을 열었습니다. 다음 1911년이 되자 이 사장님이 예전의 이름을 ‘공화춘’이라고 바꿉니다. 중국 친구 분들은 1911년 발생한 신해혁명을 알고 계시지요? 이 사장님은 저 사건이 기억할만하고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아시아에서 중국이 처음으로 공화국 수립에 성공하였기 때문입니다. 공화국 수립을 기념하여, 그는 공화춘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마치 봄이 오듯이, 공화국 수립이 좋은 일이라고 느꼈습니다. 공화춘은 독특한 음식을 팔았는데, 바로 자장면입니다. 자장면은 중국에서 온 것입니다. 하지만 공화춘 식당은 중국의 전통 자장면을 한국인의 입맛에 더 맞도록 바꾸었습니다. 공화춘은 중국 노동자들과 한국의 일반인에게 모두 환영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중국에서 온 사람들은 공화춘에서 중국 요리를 먹으며 고향을 그리워했고, 한국 사람들은 중국 분위기의 음식을 즐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화춘은 1983년 문을 닫았습니다. 이후에 2010년 인천시 정부가 이 식당 건물을 샀고, 12년에 ‘인천짜장면박물관’을 연 것입니다.


예전에 공화춘에서 사용했던 계산서입니다.


‘세 개의 칼’은 요리용 칼, 의류재단용 칼, 이발용 칼을 말하는데, 한국 화교의 상징입니다. 외국에서 온 화교는 한국에서 일자리를 잡는 것이 좀 어려웠습니다. 그렇지만 일단 식당이나 양장점, 이발점을 열기만하면, 더 쉽게 돈을 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처음 온 화교가 이러한 상점을 열면, 그들의 자녀가 계속해서 부모가 문을 연 상점에서 일을 하고, 그들의 손녀가 또 계속해서 여기에서 일하게 됩니다.

19세기말부터 많은 중국 노동자들이 인천항에서 일하였습니다. 그들은 한국에서 중국풍의 식당을 찾지 못했고, 게다가 그렇게 많은 돈이 있지도 않았습니다. 제일 중요했던 것은 그들은 시간이 별로 없었습니다. 힘을 들여 요리를 할 수 없었지요. 그래서 그들은 중국에서 가져온 춘장을 면에 부은 후, 몇 분만 볶으면, 쉽게 자장면을 완성해 먹는 방법을 생각해 냅니다. 중국인 노동자 두 분이 함께 자장면을 먹고 있습니다. 보아 하니 그들은 아주 피곤해 보입니다.



1960년대에 공화춘 식당에서 제공한 부채입니다.


1960년대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자장면을 함께 먹고 있습니다. 한국 노인들에게 자장면을 먹는 것은 일종의 잊을 수 없는 추억입니다. 50년대에서 70년대까지, 한국은 너무 가난했습니다. 그 때 대부분의 한국 백성들은 영양이 부족했습니다. 자장면을 먹으면, 단백질과 지방을 보충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당시에 자장면은 가난한 일반 백성들에게는 좀 비쌌습니다. 그래서 많은 학생들은 일년에 두 세 번 정도만 겨우 자장면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생일이나 입학식 혹은 졸업식 정도입니다.

자장면이 점점 환영을 받게 되자, 라면 회사들도 ‘자장라면’을 개발합니다. 1970년대에 자장라면의 가격은 20원 정도였지만, 2016년에 자장라면은 가격이 1000원 정도입니다. 약 50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물가가 저렇게 폭발적으로 오른 것입니다.


2000년대에, 자장라면의 종류가 많아졌습니다. 어떤 회사는 ‘사천자장’을, 또 어떤 회사는 ‘카레짜장’을 팔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러한 자장라면을 먹어 본 적이 없습니다. 제 생각에 저러한 라면들은 맛이 정말 독특해서, 소비자들에게 환영을 받지 못한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