礼山旅行记(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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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 29, 2016 01:15 汉语
《商务社》是商人组织。 在礼山商务社的努力活动, 所以为了纪念他们建设了博物馆。 朝鲜时代呢,跟现在不一样, 没有大型超市和便利店。那偏僻的农村人怎么买东西呢?这个商务社解决这个问题, 这个组织派遣商人, 偏僻的农村人买到东西。 那时没有自行车或者火车, 商务社的人都是亲身动身, 他们天天走路卖东西。听说他们走路的速度那么快, 比一般人跑步的速度一样。 朝鲜时代后期和日本殖民时代初期, 朝鲜政府利用这个组织, 控制对手政治势力。商务社是商人组织, 怎么能变成了政治势力呢? 第一, 这个组织在韩半岛到处都有, 而且他们互相团结, 朝廷命令的话, 很短的时间内到韩半岛的偏僻的地方都传达命令。 第二, 他们走路的速度真快, 传达紧急秘密文件也有好处。 但是商业发达以后, 交通条件好了以后, 在偏僻的地方也容易买得到东西。商务社的组织越来越弱了, 现在的韩国人都忘了商务社的存在。

商务社的商人有两种, 就是《褓商》和《负商》。褓商卖奢侈品, 所以带着东西比较轻。 负商卖日常生活用品和海鲜, 他们的东西很重而且很大, 他们用背架运他们的商品。

我觉得商务社是值得佩服的商人组织的。 商务社的功能好像现在的快递和电视台一样。 褓商和负商在规模大的市场买东西以后, 他们去偏僻的地方卖东西。他们在大城市的市场听新闻以后, 在农村卖东西的时候, 对偏僻的地方人传达“新闻快报”。 以前没有手机和汽车的时候, 没有这些商人的话, 我们韩半岛的祖先的生活更野蛮, 我觉得。

尹奉吉是在礼山出生抗日运动的人。 他1908年在礼山出生, 1930年离开礼山。 他偷偷地离开他家, 离开的天,写给父母信 : “丈夫出家生不还”。这句文章的意思是他已经决定了为了抗日运动牺牲。为了纪念他的抗日运动, 在礼山建设了《尹奉吉义士纪念馆》。

在日本殖民时期, 大部分的韩半岛人都是文盲。 尹奉吉在礼山生活的时候, 他教了家乡的孩子。有一天,有的文盲人找尹奉吉, 说 : “我一个字也看得懂。 我不知道我爸爸名字的汉字。 我要找去我爸爸的坟墓, 但是很多坟墓前边有很多碑文。我不知道哪个是我爸爸的。 所以我拔所有的碑文。 你找一下我爸爸的碑文。”尹奉吉受到冲击, 想 :“我们朝鲜半岛人都是这样笨, 怎么克服日本的统治, 怎么赢日本的侵略?我应该动身, 为了抗日运动牺牲!”

图片上的饭盒儿和水桶不是一般的饭盒儿, 而是炸弹。1932年4月29号, 在中国上海的虹口公园, 为了祝贺日本天皇的生日, 地位高的日本人都来了。 尹奉吉带着图片上的“饭盒儿型爆炸”,骗日本警察进去了这个公园。 日本警察不知道这个是不是危险的东西。

상무사는 상인조직입니다. 예산에서 상무사가 열심히 활동했기 때문에, 그들을 기념하기 위해 박물관을 건설하였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지금과 달라서, 대형마트나 편의점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오지에 있는 농촌사람들은 어떻게 물건을 샀을까요? 이 상무사가 이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상무사 조직에서 상인들을 파견하여, 오지에 있는 농촌 사람들도 물건을 살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자전거나 기차가 없었습니다. 상무사 사람들은 직접 몸을 움직여서 매일매일 걸으며 물건을 팔았습니다. 듣기로는 그들이 걷는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일반 사람들이 뛰는 속도와 같았다고 합니다. 조선시대후기와 일본 식민지시기 초기에는, 조선 정부가 이 조직을 이용해서, 반대편 정치세력을 제압했다고 합니다. 상무사 조직은 상인조직인데, 어떻게 정치세력으로 변했을까요? 첫째, 이 조직은 한반도 각지에 모두 있었습니다. 게다가 서로 단결을 해서, 조정에서 명령을 하면, 짧은 시간 내에 한반도의 오지지역까지 명령을 전달하였습니다. 둘째, 그들의 걷는 속도가 정말 빨라서, 긴급비밀문서를 전달할 때 좋은 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상업이 발달하고, 교통 조건이 좋아진 이후에는, 오지에 있는 지역에서도 쉽게 물건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상무사 조직은 점점 약해졌고, 현재 한국사람들은 상무사의 존재를 모두 잊었습니다.

상무사의 상인은 두 종류인데, 바로 보상과 부상이 그것입니다. 보상은 사치품을 팔기 때문에, 가지고 다니는 물건이 비교적 가볍습니다. 부상은 일상생활용품과 수산물을 팔았는데, 그들의 물건은 아주 무겁고 부피가 커서, 지게를 이용하여 상품을 운반하였습니다.

저는 상무사가 탄복할만한 가치가 있는 상인조직이라고 느낍니다. 상무사의 효능은 마치 현재의 택배회사와 방송국과도 같습니다. 보상과 부상은 규모가 큰 시장에서 물건을 산 다음, 오지 지역에 가서 물건을 팝니다. 그들은 대도시 시장에서 최신 소식을 듣고는, 농촌에서 물건을 팔 때, 오지지역 사람들에게 ‘최근의 핫한 뉴스’를 전달해 주엇습니다. 예전에 휴대폰과 자동차가 없던 때에, 이러한 상인들이 없었다면, 우리 한반도의 선조들의 생활은 더 야만적이었을 것이라고 저는 느낍니다.

윤봉길은 예산에서 태어난 항일운동가입니다. 그는 1908년 예산에서 태어나 1930년에 예산을 떠났습니다. 그는 몰래 집을 떠났습니다. 떠나던 날, 부모님에게 편지를 씁니다. ‘장부출가생불환’. 이 문장의 뜻은 그가 이미 항일운동을 위해 희생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그의 항일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예산에 <윤봉길의사기념관>을 지었습니다.

일본 식민지 시기, 대부분의 한반도 사람들은 모두 문맹이었습니다. 윤봉길이 예산에서 생활할 때, 그는 고향의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어느 날, 문맹자 한 사람이 윤봉길을 찾아와 말햇습니다. “저는 한 글자도 못 알아 봅니다. 저는 저희 아버지의 이름 한자를 모릅니다. 제가 저희 아버지의 무덤에 찾아 갔는데, 많은 무덤 앞에 많은 비문이 있었습니다. 저는 어떤 것이 저희 아버지 것인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저는 모든 비문을 따 뽑았습니다. 당신이 제 아버지의 비문을 찾아 주십시오. ” 윤봉길은 충격을 받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조선반도 사람들이 모두 이렇게 멍청하다니, 어떻게 일본의 통치를 극복할 것이며, 어떻게 일본의 침략을 이기겠는가? 나는 마땅히 직접 움직여야 한다. 항일운동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

사진 상의 도시락통과 물통은 일반적인 도시락통이 아니고, 폭탄입니다.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해 홍구공원에서, 일본천황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지위가 높은 일본인들이 모두 왔습니다. 윤봉길은 사진상의 ‘도시락 모양 폭탄’을 지니고, 일본경찰을 속이고 이 공원에 들어갔습니다. 일본경찰은 이것이 위험한 물건인지 아닌지 몰랐습니다.